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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스크랜턴(Mary Scranton, 1832~1909)_최초여성선교사, 이화학당설립

바로세움 2024. 3. 13. 09:50

 

1893년 10월 10일 노블(Mattie Wilcox Noble, 1872~1956) 여사의 일기 내용이다. 너무 가난해서 13세 여동생을 팔아버리려는 오빠 이야기도 나온다. 하지만 소녀의 어머니는 머리칼을 팔아서 어린 딸을 서울 이화학당에 보내려고 한다. 가난과 무식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래도 평양 근처 진남포(鎭南浦)에서 서울까지의 뱃삯과 여비에는 턱없이 모자랐는데 노블 여사가 반을 보태준다.

 

근대화 시기 우리나라 여성과 어린이의 인권침해는 상상 이상이었다. 양반집 아녀자가 아니면 교육받을 기회조차 없었다. 특히 여성들은 병이 나도 대부분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가부장적 가치관이라는 전통과 인습의 굴레 속에서 제일 고통받는 부류가 여성이었다.

 

정동 예원학교 맞은편에는 정겨운 토담길이 있다. 덕수궁 드높은 돌담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이화여자고등학교 동문(東門) 바로 옆에는 하마비가 서 있는 옛 대문이 있다. 문은 담이라고 하는 차단의 벽에 내놓은 선택적 통과의 공간이다. 문밖 사람과 문 안 사람들은 의식구조와 세계관은 물론 신분이나 소속이 다르다. 때로는 구원의 경계가 되기도 한다. 일찍이 개화기에 이 문으로 들어선 사람들은 분명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문 안에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고 자아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발견이야말로 근대가 준 선물이다. 차별받던 ‘암흑의 나라’ 여성들이기에 그 선물은 더 값졌다.

 

1886년 한국 최초의 여성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Mary Scranton, 1832~1909)은 이 토담 안에 조선 여인들의 해방구를 열었다. 이화여고와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학당의 설립자 스크랜턴은 대부인(함께온 며느리와 구분하기 위해 당시 사람들이 부른 호칭이다)의 기품을 지녔던 듯하다. 1872년 남편과 사별한 그는 1885년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의 파송으로 의사인 외아들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 1856~1922)과 함께 한국에 온다. 새 터를 잡고 곳곳에 건물을 세운 그는 왕성한 창업자의 면모를 보인다. 한국 최초의 여성 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을 설립했고 동대문감리교회, 아현감리교회, 상동감리교회를 세웠다. 이 땅에 여생을 바친 그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혔다.

 

우리의 목표는 한국 소녀들로 하여금 우리 외국인들의 생활양식, 의복 및 환경에 맞추어 바꾸어지기를 바라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다만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이 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우리는 한국적인 것에 긍지를 갖는 한국인이 되기를 희망한다.”

 

스크랜턴 대부인의 한국 여성 교육관이었다. 1886년 11월 학교 교사를 ㄷ자 형 200칸 규모의 기와집으로 지은 것도 그래서다. 교실과 기숙사를 갖춘 번듯한 교사를 세웠지만 지원자가 하나도 없었다. 신학문과 영어를 배워 출세하려고 청년들이 몰려들었던 배재학당과는 딴판이었다. 반년이 지나서야 첫 학생을 받았다. 고관의 소실 김 부인이었다. 한 달 뒤 열 살가량의 꽃님이가 왔고 네 살 난 별단이도 왔다. 꽃님이는 가난한 어머니가 도저히 부양할 길이 없어 맡긴 경우였고 별단이는 1886년 여름 서울에 돌았던 콜레라에 걸려 버려진 여인의 딸이었다. 의사인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이 성 밖에서 발견해 데려다 치료했다.

 

이화여고 동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높은 성벽이 보인다. 서대문과 서소문 사이 성벽 일부가 남은 유적이다. 지금은 교정이 훨씬 넓어져 성벽 바깥 순화동 쪽에 도서관과 운동장, 유관순기념관, 체육관 등이 세워졌지만 초창기는 성벽 안쪽으로 정동교회와 접한 공간이 전부였다. 백주년기념관 자리에는 유명한 손탁호텔이 있었다. 2층으로 된 이 서양식 호텔에서 서구 열강의 외교관들이 치열한 각축전을 펼쳤다. 정동구락부의 모임 장소로도 이용된 손탁호텔은 100년 전의 국제도시 정동의 중심이었다.

 

이화박물관이 된 심슨홀(정식 명칭은 심슨기념관)은 100년 가까이 그 자리를 지켜온 등록문화재다. 문화유적과 유물은 현장이라는 장소성(장소의 의미, 즉 역사적, 지형적, 지리적 의미뿐만 아니라 인간의 추억과 경험이 축적된 장소로서의 의미)과 맞물릴 때 가치가 제대로 드러난다. 이 건물에서 한국 여성 신교육 126년사를 체험하는 일은 새뜻하고 값지다.

 

이화여고 본관 정원에는 한국 여성 신교육의 발상지 기념비가 서 있다. 동향으로 지어졌던 이화학당 초창기 건물 자리다. 정원 남동쪽 아래에는 오래된 우물 하나가 있다. ‘유관순 열사가 빨래하던 우물’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띈다.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학한 유관순(柳寬順, 1902~1920) 열사는 3·1운동 때 만세 시위를 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순국했다. 유관순 열사는 이화의 영웅이자 민족의 영웅이다. 영웅이란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한 위대한 일을 해낸 사람,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자신보다 더 큰 가치에 기꺼이 바친 숭고한 이를 말한다.

 

이화학당은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한 명문의 상징이다. 20세기를 만든 각 분야 여성 1호가 대부분 이화학당 출신이다.

1900년,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인술을 펼친 최초의 여성 양의사 김점동(金點童, 박에스터, 1879~1910), 한국 여성 최초로 미국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여성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북경에서 독살당한 하란사(河蘭史, 1875~1919) 등은 위대한 이화인들이다.

 

하란사가 입학할 당시 학당장 프라이(L. E. Frey) 앞에서 보였던 등불 퍼포먼스는 경전 속 에피소드처럼 감동적이다. 그는 이화학당에서 배우기 위해 여러 차례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기혼자라는 이유로 번번이 거부당하고 만다. 그는 낙담하지 않고 묘안을 짜낸다. 어느 날 저녁, 하인에게 등불을 들려서 학교를 찾는다. 프라이 학당장 앞에서 등불을 끄자 사방이 캄캄해졌다.

 

“내 삶이 이렇게 어둡습니다. 제발, 밝은 학문의 빛을 열어주세요.”

유부녀 하란사의 호소에는 배우지 못한 조선 여인의 한이 짙게 배어 있었다. 프라이는 그만 감동의 도가니에 빠지고 만다. 이런 여인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학교의 존재 이유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프라이는 입학을 허가한다. 1896년 이화학당에서 벌어졌던 드라마다. 하란사는 본래 김해 김씨인데 결혼하고 남편 하상기(河相驥)의 성을 따랐다. 혼란스러운 개화의 물결 속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서양 풍습을 받아들인 신여성이었던 것이다. 젖먹이를 떼어놓고 미국 유학을 떠난 그녀는 한국인 최초 자비 유학생이 된다. 귀국하여 이화학당 교사 겸 기숙사 사감을 지냈으며 김윤식(金允植, 1835~1922), 유길준 등 당대의 남성 선각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연설가로 활약했다. 1919년 파리평화회의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려던 계획이 일본 경찰에 알려져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북경에서 객사했다. 물론 일제의 독살설도 있다.

 

최초의 여성 박사 김활란(金活蘭, 1899~1970)도 이화학당 출신이다. 현대 인물로는 첼리스트 정명화(1944~ ), 피아니스트 신수정(1942~ ), 이희호(李姬鎬, 1922~ ) 여사, 지은희(1942~ ) 덕성여대 총장, 이명희(李明熙, 1943~ ) 신세계그룹 회장, 김성주(1956~ ) 성주그룹 회장 등 일일이 거론할 수조차 없는 인물들을 배출했다.

 

이른바 ‘유관순 우물’에 대한 촌평 하나.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동문들이 이 우물물을 마시고 빨래를 하거나 그 뜰을 거닐었을 텐데 굳이 이 우물까지 유관순 열사와 결부시켜야만 했을까. 유관순기념관과 동상이 세워졌으니 이제는 이 표지판과 유관순 우물이라는 명칭은 떼어도 좋을 듯하다. 무엇이건 넘치면 도리어 의미가 퇴색되기 쉽다.

 

이화여고의 명물 가운데 하나가 6,000석 규모의 노천극장이다. 로마 원형극장을 떠올리게 하는 석조 계단에 앉아서 이화의 정신을 가늠해본다. 예전에는 여기서 입학식과 졸업식, 신앙 부흥회, 연극이나 공연도 했다고 한다. 어수선했던 한국전쟁 직후인 1956년, 이런 노천극장을 교내에 세우고 빙 둘러앉아서 자칫 의례적일 수도 있는 행사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할 줄 알았던 이화인들, 참 멋지다. 시간에 매몰되기 쉬운 인간의 기억은 공간과 함께 묻어온다. 사소한 의식일지라도 장소가 각별하면 의미가 더 깊어지고 오래가는 기억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이화여고생들은 걸어가는 뒷모습만 봐도 금방 알아볼 수가 있어요. 느긋하고 자유롭습니다. 잘난 사람들 앞에서도 열등감이 없고요. 언제 어디서나 ‘약한 이 힘 되고 어둠의 빛 되자.’는 교가 구절이 가슴 저마다에 새겨져 있는 것이죠. 큰 교육자 신봉조(辛鳳祚, 1900~1992) 교장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고 봅니다. 선생님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게 개성이고,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 가진 재주가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학교법인 이화학당(이화여대) 장명수 이사장은 신문기자 시절 칼럼을 쓸 때마다 격려 전화를 해줬던 은사를 숭경한다. 신봉조 선생은 23년간 이화여고 교장을 지내고 한평생 이화에 혼을 쏟아 부었다. 생활은 검박하고 교육적 이상은 원대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 가서 임시 학교를 운영할 때,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예술 학교를 구상했던 선구자였다.

 

신봉조 교장을 말하면서 빼놓지 말아야 할 업적 가운데 하나가 현재 900호를 넘긴 교지 『거울』의 창간이다. 1954년 4월 5일, 주간지로 창간된 교지는 ‘이미 지나간 과거를 날인해 남기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예측하고 포착해오는’ 이화의 거울이다. 초창기 『거울』지를 넘겨보면 학생들의 교내 활동 내용은 물론 내로라하는 당대 유명 문인들의 글이 실려 있다.

이화학당은 창설 이래 1907년까지 약 200명의 학생을 교육하고 결혼까지 시켜 내보냈지만 정식 졸업식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학생이 나이 들면 교사들이 신랑을 구하고 혼수품을 마련해 시집을 보내주었다. 결혼이 곧 졸업이던 시절이었다. 1904년 4년제 중학과 설치에 따라 1908년 6월 비로소 1회 졸업식을 거행하고 5명의 졸업생을 배출한다.

 

1908년 동창들의 친목을 위한 연락체로 동창회가 발족한다. 이들이 ‘신여성’ 1세대이다. 이들의 사회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새로운 여성상인 신여성이 등장한다. 그 전까지는 여학도로 불렸다. 신여성이란 봉건적 인습을 떨쳐내고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민족해방운동, 남녀평등을 위한 여성해방운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의식적인 노력을 하는 여성이다. 배운 여성으로서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화정신은 동창회 활동을 통해 구현되었다.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가 출범한다. 첫 교장은 배재학당을 세운 아펜젤러가 한국에서 낳은 딸, 앨리스 아펜젤러(Alice Rebecca. Appenzeller, 1885~1950)다. 그는 이 땅에서 태어난 최초의 백인 아기다. 그의 어머니가 이화의 창설자 스크랜턴과 함께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 이미 어머니의 태중에서 자라고 있었다. 아버지 아펜젤러가 세운 정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한국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웨슬리대학을 졸업한 그는 이화여전을 모교와 닮은 여자대학으로 키우고 싶어 했다. 오늘날 이화여자대학교는 세계 최대의 명문 여대 중 하나로 성장했다. 이화여고와는 뿌리를 같이 하지만 이후 다른 법인으로 분리되었다.

 

“고종은 배재학당과 마찬가지로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을 내려줍니다. 그런데 그 현판은 물론 초창기의 유물들을 제대로 보전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종용 박물관장은 기획 전시 유물 확보와 복원의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이화학당은 한국 여성 교육사의 중심이다. 초창기 터전을 지켜내지 못하고 변두리로 밀려난 대부분의 학교들과 달리 이화여고는 정동 터에서 더 확장하며 발전해왔다. 이화가 서울시민과 온 국민에게 이화의 정신에 서린 한국 여성 교육사를 소곤소곤 이야기해줘야 할 때다.

 

이화여자고등학교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2번지
역사
1886년 5월 31일 : 창립(한국 최초 여성 교육기관)
1887년 : 고종이 교명 ‘이화학당’ 하사
1904년 : 4년제 중학과 설치
1910년 : 한국최초 여자대학과 신설
1925년 : 대학과를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칭
1935년 : 전문학교와 보육학교 신촌으로 이전 분리(이화여자대학교)
1950년 : 3년제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개편
1953년 : 이화예술고등학교 신설(서울예고 전신)
1966년 : 예원중학교 설립(예원학교 전신)
1988년 : 서울예술고등학교와 예원학교 분리
1968년 : 중학교 폐교
1992년 :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신설

 

심슨기념관
분류 : 등록문화재 제3호
준공 : 1915년 준공
규모 : 지하 1층, 지상 3층
현재 : 이화박물관으로 사용

 

1886.05.31
미국 감리회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여사가 기독교 정신을 토대로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을 창설
1887
고종황제께서 이화학당이란 이름을 하사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인 보구녀관(保救女館)[2] 설립(現 이화여자대학교의료원)
1904
4년제 중학과 설치
1910
대학과 설치
1914
이화유치원 설치(現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유치원)
1915
유치원 사범과 설치(現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유아교육과)
1925
대학과를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편
1935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정동에서 신촌으로 이전
1943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의 재단(학교법인 이화학원)과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재단(학교법인 이화학당)을 분리
1946
4년제 고등여학교[3]를 6년제 여자중학교로 개편
이화여자전문학교 종합대학 이화여자대학교로 개편(한국 최초의 종합대학)
1951
한국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하여 임시 교사(校舍) 마련
바뀐 교육법에 따라 3년제 이화여자중학교와 3년제 이화여자고등학교로 개편
1953
예능교육의 전문화를 위해 서울예술고등학교 설립
1966
예능교육기관(예술중학교)인 예원학교 설립
1971
중학교 입시 폐지 및 중학교 평준화로 이화여자중학교 폐교[4]
1988
예원학교  서울예술고등학교가 학교법인 이화학원에서 분리되어 학교법인 이화예술학원으로 독립
1991.09.11
이화학원이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설립인가를 받음.
(영어과 2학급, 독일어과 · 프랑스어과 · 중국어과 · 일본어과 각1학급)
1991.11.10
첫 신입생 선발고사 실시
1992.03.02
1992.03.02
초대 심치선 교장 취임
1992.03.02
첫 신입생 308명 입학
1993
일본어과를 폐지하고 프랑스어과를 2학급으로 증설
1995.03.03
2대 오혜식 교장 취임
2001.09.01
3대 장덕희 교장 취임
2009.02.06
15회 졸업생 217명 졸업
2009.03.02
4대 한현수 교장 취임
2011.02.09
18회 졸업생 210명 졸업 (졸업생 총계 4,548명)
2012.03.02
21회 신입생 181명 입학
2013.02.06
19회 졸업생 201명 졸업 (졸업생 총계 4,749명)
2013.03.04
22회 신입생 168명 입학
2014.02.13
20회 졸업생 192명 졸업 (졸업생 총계 4,941명)
2014.03.03
23회 신입생 160명 입학
2017.02.09
23회 졸업생 159명 졸업 (졸업생 총계 5,449명)
2017.03.02
26회 신입생 137명 입학
2017.03.02
5대 전정연 교장 취임
2021.02.08
27회 졸업생 135명 졸업 (졸업생 총계 6,025명)
2021.03.02
6대 심충구 교장 취임
2021.03.02
30회 신입생 122명 입학
2023.03.02
32회 신입생 132명 입학

 

미국에서의 생애[편집]

미국 매사추세츠주 태생으로 당시 마차를 생산하던 지역 벨처타운에서 목사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2]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목사였으며, 스크랜튼은 12세 때 기독교에 입교했다. 그녀는 공립 학교를 졸업하고 코네티컷주에 있는 노리치 여학교에 입학했다.[3] 1853년 제철업자인 윌리엄 스크랜튼과 결혼하여 아들 윌리엄 벤튼 스크랜튼을 낳았고, 1872년 남편과 사별하기 전까지 코네티컷에서 거주했다. 그녀는 남편의 사망 이후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을 따라 오하이오에 정착했으며,[4] 그곳의 교회를 통해 여성해외선교사회(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WFMS)에 가입하여 해외 선교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5]

1869년 설립된 여성해외선교사회는 매사추세츠에 위치한 도시인 보스턴 트레몬트가를 중심으로 여성 선교사를 모집하고 있었다.[6] 이 선교사회는 남성 중심의 선교활동에서 벗어나[7] 9가지 교파를 아우르는 수천 명의 후원자를 가진 단체로 성장하여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여성선교단체가 되었다.[8] 이는 19세기 초반 매사추세츠를 중심으로 확산된 여성선교 운동이 남북전쟁을 계기로 12개의 여성선교단체가 기존의 미국 내에서만 이뤄졌던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복음 운동을 국제적으로 확대한 데에 따른 것이었다.[9]

한국 선교사 임명[편집]

1884년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이 예일 대학교를 졸업,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윌리엄은 한국의 첫 번째 감리교 선교사가 되었다. 스크랜튼은 아이들이나 학생들과 가까이 지냈고, 그녀는 아들의 활동에 힘쓰기로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여성해외선교사회는 메리 스크랜튼이 한국에서 이 선교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것을 권하는 의견을 나타내기도 했으나, 그녀는 이 요청에 대해 "제 아들의 요청도 저에게는 또한 하나의 요청입니다."(The call of my son ... was a call to me also.)라고 답신했다.[10]

하지만 여성해외선교사회의 대다수는 메리 스크랜튼의 가족관계와 나이 때문에 그녀를 한국에 적합한 여성선교 활동의 인물로 보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을 잃은 과부였고, 이것이 해외 선교활동에 있어 20대에서 30대의 미혼의 여성보다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여 선교사회는 좀 더 젊은 여성을 대표자로 보내는 것이 적합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여성해외선교사회 규정에는 충분한 지적 소양을 갖출 것과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맡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출 것을 명시하고 있었으며 그녀는 선교사회에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스크랜튼은 그녀가 이전 해왔던 사회 활동들은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유능함을 보여주는 예이며, 비록 예상치 못하게 해외선교를 하게 되었을지라도 그녀는 한국에서의 활동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11]

한국에서의 활동[편집]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한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일본에서의 생활은 즐거우며 선교사들의 생활 조건도 훌륭하나 나는 내 민족(한국인)에게 가서 그들 속에서 살고 싶다"라고 하기도 하였다. 1886년 메리 스크랜튼은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이화학당을 세웠으나 학생을 구할 수 없어서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한국 여성들의 대부분은 집안일을 배우며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거나, 하층민의 딸인 경우 매매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 남녀내외법도 스크랜튼의 큰 고민거리였다. 설교하거나 가르치는 사람은 대부분 남성이었는데 이들은 여학생들과는 얼굴을 맞댈 수 없었다. 이화학당에서 남자 선생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부모들이 딸을 교육시키지 않겠다고 항의함에 따라 스크랜튼은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 휘장을 치고 서로 그 모습을 바라보지 않게 하는 방법을 이용하였다.

그 후 1905년 내한한 프레이에게 학교 일을 맡기고 계속 이화학당의 일을 도우며 삼일소학당, 공옥여학교, 매일여학교를 세웠으며, 또 진명, 숙명, 중앙여학교들의 설립을 도우고 동대문, 상동, 애오개 병원과 교회를 도왔다. 그리고 수원, 여주, 이천, 천안, 홍성 등에서 선교와 교육활동을 하다가 1909년 10월 8일 한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스크랜튼은 유언에 따라 한국에 묻혔는데 그녀의 묘지는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위치해 있다.

 

신봉조 생애 및 활동사항

1900년 강원도 정선에서 출생했다. 1919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재학시 3·1운동에 참여해 체포되어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1924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역사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1927년 4월 일본 유학을 가서 도호쿠(東北)제국대학 법문학부를 1930년 졸업, 바로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복직해 1938년까지 근무하다가, 이화고등여학교 교장으로 전직했다. 특히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장 재직 때에는 조선총독부의 학교재단 몰수에 항거하여 한국인이 주체가 된 유하학원을 설립해 재정의 자립을 이루었다. 1920년에는 조선에스페란토협회 창립에 참여했다.

1939년 5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가 되었으며, 1940년에는 황도학회의 발기인 겸 회장이 되었다. 1941년에는 녹기연맹이 주최한 좌담회에 참여했으며, 9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경성)으로 참여했다. 1943년에는 배재중학교에서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연설을 했으며, 1944년 3월 종로총궐기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했다. 이외에도 다양한 잡지와 신문에 친일적인 내용의 글을 기고했다.

 

해방 이후에는 19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반민특위에 체포됐으나 처벌받지 않았다. 1945년 10월부터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장이 되었으며, 1948년 새교육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53년 이화예술고등학교를 설립, 교장이 되었다. 1954년부터 1991년까지 학교법인 상명학원의 이사 및 이사장을 역임했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학교법인 이화학원 상무이사를 지내다가 1963년 2월부터 1989년 5월까지 이사장을 지냈다. 이외에도 학교법인 한양학원·영훈학원·연세대학교·재헌학원·새빛학원·인덕학원·배재학당의 이사 또는 부이사장을 역임했다. 1992년 12월 27일 사망했다.

신봉조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9: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54)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辛鳳祚
1900년[1] 8월 20일[2][3] ~ 1992년 12월 27일 (향년 92세)

1900년 8월 20일 강원도 정선군 서상면 상평리(現 정선군 정선읍 광하리 상평마을)에서 아버지 신기묵(辛綺默, 1868 ~ 1930. 5. 4)[5]과 어머니 정선 전씨(1867 ~ 1933. 5. 28)[6] 사이에서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정선군 정선면(現 정선군 정선읍) 봉양리 280번지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다. 12살 되던 1911년 개신교(북감리회)에 입교해 정동예배당에 주로 출석했다.

일찍이 정선공립보통학교(現 정선초등학교) 졸업 후 상경한 뒤 경기도 경성부 효자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동) 77번지 임재덕(林在德)의 집에 기거해 가정교사 노릇을 하면서 임재덕의 어린 자식들을 가르쳤으며, 이렇게 번 돈으로 배재고등보통학교(現 배재고등학교)를 다녔다. 이 밖에 고향 집과 배재고등보통학교로부터 각각 매달 5원씩 보조를 받았음에도 형편은 녹록지 않았으나, 그 뒤 김운호(金雲鎬)[7]의 후원으로 공부를 계속하면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지망할 수 있었고, 졸업을 앞둔 1919년 2월 신체검사를 받은 뒤 무시험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할 예정이었다. 이 즈음에는 경성부 정동(現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4번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경성의학전문학교 진학 후 쓸 용돈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 원동(現 종로구 원서동)에 있던 김운호의 집에 찾아가던 도중 종로2정목(現 종로구 종로2가) 파고다공원 육각당(六角堂)[8] 안에서 두루마기를 입고 얼굴이 암모나이트 같은 남자가 기미독립선언서를 읽고 얼마 뒤 만세시위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이에 만세시위에 참여하던 군중들 중에서도 500~600명 가량되던 학생들의 행렬에 가담해 독립만세를 외치며 종로1정목에서 봉래정2정목(現 중구 봉래동2가) 남대문역, 의주통(現 중구 의주로), 평동(現 종로구 평동) 서대문, 정동(現 중구 정동), 정동 주일미국공사관 소속 주 경성 영사관, 태평통(現 중구 태평로), 황금정(現 중구 을지로), 종로[9], 정동 덕수궁 대한문 앞, 광화문통 경복궁 광화문, 합동(現 서대문구 합동) 프랑스영사관, 평동 서대문, 서대문정(現 종로구 신문로), 장곡천정(現 중구 소공동), 본정1정목(現 중구 충무로1가) 경성우편국 모퉁이, 본정2정목 경성전기주식회사 앞, 본정1정목 경성우편국 앞을 거쳐 남대문통2정목(現 중구 남대문로2가) 조선식산은행에까지 갔으나 그곳에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10]

결국 3월 25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이른 바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예심이 청구되었으며, 서대문형무소 투옥되었다. 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의 예심에서 위와 같은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고,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위와 같은 혐의에 대해 징역 6개월(미결 구류일수 중 90일 본형에 산입),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출옥했다.

출옥 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복학했으나, 기존에 입학 예정이었던 경성의학전문학교에는 자연스럽게 입학 취소가 되었고 대신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해 역사학을 전공했다.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이던 1923년 2월 9일 조선학생회 창립총회에서 연희전문학교 대표로 참석해 상무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24년 졸업 후 모교인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일본에 유학해 1930년 도호쿠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했다.

도호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다시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38년 12월 제8대 이화고등여학교(現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장[11] 취임했다. 태평양 전쟁 중 조선임전보국단 등 친일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41년 9월 7일에는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에서 조직한 '채권 가두 유격대' 서대문대(西大門隊)에 소속되어 신흥우·주요한 등과 함께 "총후봉공(銃後奉公)은 채권으로부터"라고 외치며 사람들에게 태평양 전쟁 자금으로 쓰기 위해 채권을 파는 데에 앞장서기도 했다.

8.15 광복 후 1948년 9월 30일 새교육협회 창립총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9년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나 처벌받지는 않았다. 1953년 3월 이화예술고등학교(現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하여 두 학교의 교장을 겸임했다. 1961년 10월 교장직에서 퇴임한 후 학교법인 이화학원 상무이사 및 이사장, 상명학원 이사장, 한양학원 이사, 영훈학원 이사, 학교법인 연세대학교 이사 및 부이사장 등을 지냈다.

1972년 8월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받았고, 서울특별시 문화상(교육부문)을 수상했다.

1992년 12월 27일 새벽 3시 30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 48번지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